여행기_2011

여행할 때 보통은 그동안 가보고 싶어했던 곳을 선택해 가게 되지만 가끔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가기도 한다. 가보고 싶었던 곳, 아니 꼭 가야만 하는 곳을 가는 경우에는 그 운명적인 장소와 지금이라는 시간이 만나기 때문에 더 이상 지도를 보지 않더라도 또한 호텔을 미리 예약 하지 않더라도 좋다. 어떤 끌림에 이끌려서 간 것인지라 무엇을 먹을까 이곳에서 얼마나 더 머무를 것인가 등을 굳이 생각하고 계획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간혹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발이 떨어질 경우 그 곳에서는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든지 혹은 어떤 유명한 곳을 찾아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가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사실 나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한달 남짓 머물렀었고 거기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유럽은 알다시피 저렴한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긴 여행을 계획한 터라 나는 더욱 저렴한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저렴한 것을 선택한다는 것도 더 많은 다른 것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위한 핑계였을지 모른다. 아무튼 저렴한 비행기를 찾다 보니 비엔나보다는 브라티슬라바에서 빠리로 가는 비행기가 가격이 훨씬 저렴했고 비엔나에서 브라티슬라바까지는 강을 따라 배를 타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워낙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모로코에 갈 때는 비행기가 아닌 배를 선택한 적도 있었다.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끌리는 나라가 있다면 그와는 반대로 아무 이유 없이 끌리지 않는 나라도 있다. 사실 나는 동유럽 나라에는 끌리지 않는다.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유럽(그들 자신은 중앙 유럽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데) 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가서 보고는 그곳들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쪽에 끌리지 않았다.

슬로바키아는 이름은 멋있게 들렸다. 나는 소위 ‘남성적’ 소리와 ‘여성적’ 소리가 함께 섞여 있는 이름을 좋아한다. ‘슬로’ 처럼 처음에는 부드럽게 가다가 ‘키아’ 하고 강하게 나오는 이런 소리 말이다. 브라티슬라바 또한 그랬다. 그래서 비행기만 타러 다니지 말고 하루 정도를 머물기로 했다. 그리하여 4월 중순 어느날 나는 브라티슬라바에 도착했다.

비엔나에서 중형 배를 타고 브라티슬라바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독특하였다. 3면이 바다인 한반도에서 태어나서인지 강을 따라 가다 보면 다른 나라가 나온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날씨는 비가 오다가 해가 비치고 구름이 끼기를 반복했다. 강가에는 많은 집들이 있었다. ‘그림 같은 집’이 여기 도나우 강 주변에도 있었다. 사실 집이라기 보다는 방갈로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나에게도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니 그것은 나에게 집과 같이 보였다. 강을 따라가며 바라보는 자연은 반복되어도, 정렬을 이루어 서 있어도, 또는 거칠어도, 어떤 모습을 해도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들게하였다. 결국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자연에 들어있다는 것도 느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슬로바키아에 도착 했다. 숙소를 찾아가는 택시안에서 잠깐 실랑이가 있었다. 말도 안되는 돈을 내라고 해서였다. 그리고 숙소에서 나와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식당에 들어갔는데 바깥에 써 붙인 메뉴의 가격과 안에 있는 메뉴의 가격의 차이가 두배나 되었다. 거스름돈도 주지 않아 달라고 해서야 무표정하게 거슬러 주었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가끔 속아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눈썰미도 있고 의심도 많아서 속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조용한 마을에서 이방인이 밥도 먹고 사진도 찍고 하니 일종의 ‘세금’ 같은 걸 내야 하지 않을까.

밥을 먹고 나자 ‘아직도 비가 오는데 나는 여기에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도 생각났고, 떠나온 사람들도 생각났다. 또한 앞으로 만날 사람들은 누굴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밖으로 나갔다.

브라티슬라바는 그리 크지 않았다. 비가 오는데 구시가지의 이곳 저곳을 걸어 다녔다. 대성당들도 보였고 성도 보였다. 비 때문인지 몇몇 영국인 관광객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길가다가 성당에서 들려오는 미사곡들 말고는 조용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갤러리가 있길래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큰 판화가 하나 있었고 ‘CHA Cha …’라고 써있었다. 예전에 친구들이 내 이름을 줄여서 ‘차’라고 불렀는데 그냥  ‘차’라고 부르지 않고 ‘차 차’라고 불렀던 게 생각났다. 그 생각 때문인지 역시 여행은 친구와 같이 해야 해 라고 생각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강가에 있었다. 강이 보이는 호텔이 아니라 강위에 있는 호텔이었다. 보텔이라고 부르는데 보트와 호텔을 합친 것인 듯 했다. 침대, 티비, 라디오, 샤워가 다 있어서 하루를 푹 쉬기에 완벽했다. 가장 마음에 든 것은 꼭 보트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커다란 창문이었다. 때마침 해가 지고 있는 석양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뭉클한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혼자 있으면 하게 되는 생각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 더 이상 운명, 우연, 신의 존재 여부, 도덕, 미학 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나만의 생의 철학을 나름 단단히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 삶, 사람 이야기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아닐까. 그런데 누가 전능으로 세상살이를 말 할 수 있을까. 창 밖으로는 물이 흐르는데 해는 움직이지 않으니까 이상했다. 그래서 정말 내가 쉬고 있구나 라고 느꼈다. 원래 보트 위에 있다면 어디론가 움직여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샤워를 할 때 배가 한번 아주 심하게 흔들렸다. 순식간에 내 발바닥이 버티고 있는 바닥이 벽으로 바뀔 기세였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기 전에 시간이 있어서 유명하다는 현대 미술관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전날 밤 잠잤던 ‘보트’를 타고 바로 갔으면 좋았으련만 다시 가방을 챙기고 시내 버스를 타러 나갔다. 다누비아나(Danubiana)는 시내에서 먼 곳에 있었다. 먼저 Cunovo라는 마을까지는 버스를 타고 갔다. 황량한 평지를 지나 작은 일반통행 길 어딘가에서 내렸다. 마을   사람들에게 간신히 길을 묻고 갤러리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날씨가 나에게 깊은 인상이라도 남기려는 것인지 난리법석이였다. 해가 쨍쨍하다가도 아주 거센 바람이 불고 또 비가 오기를 반복했다. 헬리콥터 소리를 내는 바람 때문에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고 온 몸이 매맞는 듯 아플 정도였다. 그리고는 아주 긴 고속도로를 지나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http://www.danubiana.sk/eng/index.html

그렇게 힘들게 찾아온 곳이건만 그곳에서는 고작 현대 미술 작품 몇 개의 전시가 전부였다. 나름 미술사를 공부했기 때문이었을까, 방금 경험한 것이 미술사 그대로를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말 고되게 힘들게 그러나 씩씩하고 용감하게 바뀌면서 더 좋아졌다가 더 나빠지기도 하기를 반복한 후에 만들어진 현대 미술은 나의 그런 생각과는 상관 없다는 듯 차가웠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언어임은 분명했다.

날씨도 차가웠고 사람들도 차가워 보였던 브라티슬라바에서의 하루였다. 그 이유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말한 것처럼 슬로바키아가 외국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